학원 없는 시골에서 교과서 한 권과 학교 수업으로 수능 만점 — 서준호 이야기
2013학년도 수능에서 한 학생이 언어·수리·외국어 세 영역과 사회탐구 두 과목까지 모두 만점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건 점수가 아니라 어떻게 였습니다.
경북 포항, 학원 하나 가려면 버스로 30분을 나가야 하는 시골 마을. 이름은 서준호, 포항 동성고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학원도 과외도 없이, 오직 학교 수업과 교과서, 그리고 EBS 교육방송만으로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화려한 강의도, 관리형 학원의 시스템도 없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배움의 주인은 시스템일까, 나 자신일까.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으로 떠났고, 어머니는 타지에서 식당을 하며 한 달에 한두 번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곁을 지킨 건 연로하신 할머니뿐이었습니다.
많은 학생이라면 "학원도 못 다니는데 어떻게"라며 환경을 탓했을지 모릅니다. 서준호는 반대로 갔습니다. 학원비를 부모님께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결핍은 저주가 아니라 자립의 조건이었습니다. 기댈 곳이 없으니,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질 수밖에 없었고 — 그래서 오히려 완전한 공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시중의 문제집을 잔뜩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목표는 단 하나 — 학교 교과서와 수업 노트 한 권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습서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이 여러 권에 흩어져 있으면, 복습할 때마다 "그게 어디 있었지" 하며 힘이 샙니다. 그래서 그는 교과서를 기준점으로 삼고, 수업 중 선생님의 설명·예시·강조까지 전부 그 교과서 여백에 한곳으로 모았습니다. 그렇게 교과서 한 권이 자기 머릿속과 똑같이 정리된 나만의 지식 창고가 되었습니다.
그의 공부는 거창한 비법이 아니라 세 단계의 반복이었습니다. 지난 이야기의 '백지 복습(꺼내기)'과 '간격 복습(나눠서)'이 여기서도 그대로 살아 움직입니다.
다음 시간에 배울 곳을 미리 읽으며 "무엇을 모르는지"를 질문으로 뽑아 둡니다. 밑그림이 있으면 수업은 '처음 듣는 말'이 아니라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선생님을 뚫어지게 보며, 예습 때 세운 내 생각이 맞는지 실시간으로 대조합니다. 교실을 나만의 1:1 수업으로 바꾸는 힘은 강렬한 집중과 반응에서 나옵니다.
수업이 끝나면 자료를 덮고, 방금 50분을 머릿속에서 처음부터 다시 돌려봅니다(다시 읽기가 아니라 꺼내기). 그래도 안 풀리는 건 교무실로 달려가 확인했습니다.
"이거 어떻게 풀어요"가 아니라 "제 생각은 여기까지인데, 어디서 꼬였나요". 답을 받아 적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의 틈을 찾아 메우는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수업 하나에 이 세 단계를 얹어 보세요. 5분이면 충분합니다.
배움의 주권은 시스템에 있지 않습니다.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스스로 질문을 벼려내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서준호가 이론을 외워 공부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학습 과학이 밝혀낸 원리와 놀랍도록 맞아떨어집니다. 하나씩 풀어 봅니다.
우리가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정보의 양(작업기억)은 아주 좁습니다. 예습 없이 수업에 들어가면 낯선 용어를 파악하느라 그 좁은 공간이 꽉 차, 정작 중요한 설명은 흘려버립니다. 미리 밑그림을 그려 두면 수업 중 뇌의 여유가 생겨, 그 여유를 깊은 이해에 쓸 수 있습니다(존 스웰러의 인지부하 이론).
술술 읽히는 공부는 '아는 것 같은' 착각만 줍니다. 반대로 자료를 덮고 애써 꺼내는 불편한 공부일수록 오래 남습니다. 서준호가 요약 강의 대신 스스로 지문을 뜯어보고, 다시 읽기 대신 머릿속으로 수업을 재생한 것이 바로 이 '바람직한 어려움'입니다(로버트 비요크). 지난 호의 백지 복습과 같은 원리입니다.
최상위권을 가르는 힘은 "나는 이걸 모른다"를 넘어 "왜 모르는가, 내 생각의 어디가 어긋났는가"까지 짚어내는 능력입니다. 그가 교무실에서 "제 사고의 어디가 꼬였나요"라고 물은 건, 선생님을 내 생각의 오류를 찾아 주는 도구로 쓴 것입니다. 답이 아니라 사고 과정을 검증받은 셈입니다.
잠을 줄여 공부하다 보니 졸음은 늘 적이었습니다. 그는 졸릴 때 서서 공부했습니다. 자습실 신발장 위에 책을 올려 두거나, 도저히 안 되면 찬 바람을 쐬며 정신을 깨웠습니다. 몸을 움직여 뇌를 각성 상태로 되돌린 것입니다. (다만 극단적인 수면 부족은 건강을 해치니 따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점수가 더 오르지 않는 '정체기'는 누구에게나 옵니다. 대부분 "이만하면 됐다"며 멈추지만, 그는 아는 것일수록 더 조심하며 사소한 실수 하나까지 교무실에서 확인했습니다. 안주하려는 마음을 스스로 깨뜨린 것, 그것이 마지막 벽을 넘게 했습니다.
※ 위 이론들은 서준호의 공부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의 렌즈'입니다. 그가 이 용어들을 의식하고 공부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글의 바탕이 된 EBS 「공부의 왕도」 원영상입니다. 옆 QR을 휴대폰으로 찍으면 바로 열립니다.
영상 보기 https://youtu.be/pk1ylhQ-VVA